RESEVATION

스타베팅 이용후기

작성자 : 스타 l 등록일 : l 조회수 : 29

‘설마 이 사람 많은 자리에서 제 숙부를 독살하려고?’ 그럴 리는 없었지만, 혹시나 모르는 일이었다. 제가 아는 헤르시스는 미쳐 버리면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폐하.” 대공이 잔을 들었다. ‘안 돼.’ 때가 좋지 않았다. 독살 자체는 나쁘지 않았으나…… 지켜보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뭔가를 해야 했다. “제가……!” 리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될까요?” 만찬장이 고요해졌다. 리즈는 저를 보는 시선에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심지어 그중엔 헤르시스의 시선도 있었다. 몹시, 몹시 중요한 타이밍이었다. 이샤르는 일 년 안에 황후로서 그녀의 평생의 입지가 결정 난다고 했지만 그건 틀린 말이었다. 이 한순간에 결정 난다. 틀림없었다. 그런데……. ‘젠장. 할 말이 없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한순간에 백치가 된 기분이었다. 그러다 불현듯 안개 속을 뚫고 불쑥 튀어나온 말이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계속 이렇게 있을 순 없었다. 그 말이라도 해야 했다. “파…… 파르델리오 히스클룸!” 조금 전보다 더한 정적이 감돌았다. “그러니까 그게…….” 얼음처럼 싸늘한 공기를 견디는 것은 몹시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리즈는 이판사판이라는 심정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힘을 합쳐라’라는 뜻의 고대 왕국어입니다. 파르델리오 히스클룸.” 그 순간 처음으로 이샤르의 시선이 리즈를 향했다. 동그랗게 커져 있던 눈매가 천천히 가늘어졌다. *** 파르델리오 히스클룸. 제군들이여, 힘을 합쳐라. 발데미온 왕국의 전장 구호였다. 발데미온 역사상 가장 강성했던 왕 트리가르 발데미온이 왕자 시절에 창안하여, 병사들로 하여금 수시로 제창하게 했고, 검과 방패에도 새기게 했다. 공교롭게도 그 구호를 외치기 시작한 뒤로 트리가르는 출전하는 전투마다 백전백승을 이루었다. 그래서 세간에선 트리가르가 흑마법과 결탁하여 구호에 주술을 새긴 것이 분명하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그 정도로 사람들에게 강력한 힘을 불어넣었고, 수세에 몰린 상황에서도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 준 것이 바로 ‘파르델리오 히스클룸’이었다. 그런데……. ‘그런 건 대체 왜 알려 준 거야? 칼톤 왕자.’ 리즈는 생각했더랬다. ‘나하고 하나도 상관없는 말이잖아.’ 그렇게도 생각했더랬다. 하지만, 이젠 상관있게 되었다. 자신의 입에서 뚱딴지처럼 튀어나오는 바람에. “제가 이 말을 왜 했냐면…… 음, 그러니까…….” ‘젠장, 또 할 말이 없어.’ 어떻게든 수습해야 했다. “그전에,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여러분께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두서없는 말에 사람들의 얼굴이 어리둥절해졌다. 젊은 귀족층에선 킥킥대는 웃음소리도 들렸다. 오직 몬타네르 대공만이 흥미로운 눈을 반짝이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리즈는 그것을 보았고. 달그락 소리를 들었다. 그러자 긴장이 조금씩 풀리고, 머릿속 안개가 걷혀 갔다. 할 말이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파르델리오 히스클룸.’ 리즈는 속으로 구호를 외쳤다. 승리의 주술이 자신에게도 통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십 년 만에 제국의 주인을 되찾은 여러분들께서 그분의 짝으로 어떤 황후 감을 바랐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 “그게 제가 아니라는 것도요.” 술렁거리는 소리에 동요하지 않으려 애쓰며 리즈는 말을 이어 갔다. “그래요. 여러분들이 바라셨을 황후 후보감들 중 하나가 이 자리에 오르는 것이 조금 더 바람직한 그림이긴 했을 테죠. 가문도 가문이거니와, 교양 수준도 사교성도 높을 테니 분명 폐하께 좋은 동반자가 되어 드렸을 테고요.” 원로들이 동의하는 눈으로 리즈를 보았다. 몇몇은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저는 그들과는 다른 식으로 폐하께 도움이 되겠어요.” “…….” “함께 걷는 동반자로 적절하지 못하다면, 앞서 걷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앞서 걷는 사람은 뒷사람을 위해 나뭇가지를 치우고 돌부리를 걷어 내지요. 저도 폐하와 황실을 위해 기꺼이 그렇게 할 것입니다.” 말이 너무 술술 나오는 나머지, 제 몸에 다른 영혼이 깃들어서 대신 말해 주는 기분마저 들었다. “기대하는 바와 달라서 조금 놀랐을 겁니다. 그건 아니라고, 제가 틀렸다고 꾸짖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요. 하지만 지금 당장 제가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아무리 말해 보았자 여러분들에겐 결코 와닿지 않을 테죠. 보통 이런 유의 옳고 그름은 시간이 판단해 주는 법이니까. 그러니 저도 제가 짊어지기로 한 황후의 소임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시간이 현명하게 판단해 주길 기대할 수밖에 없겠다는 말을 해야 할 것 같군요.” ‘아니. 그럴 필요가 뭐 있겠어. 이미 잘 알고 있는데.’ 리즈는 자꾸만 떠오르려는 냉소를 억누르며 말을 이었다. “그럼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서…….” 리즈의 연설이 반환점을 돌았다. “‘힘을 합쳐라’라는 뜻의 고어 ‘파르델리오 히스클룸’을 제가 왜 말하게 되었는지 설명하겠습니다.” 이샤르의 청회색 눈동자가 이채를 띠었지만 리즈는 알지 못했다. “지금 황실은 어수선한 감이 없잖아 있죠. 세력이 여러 갈래로 분열된 탓입니다.” “…….” “현재의 황실은 벨크메르 황가가 삼백 년째 차지하고 있지만, 그 전엔 벨로다 가문의 것이었고, 그 이전엔 앙트웬 가문의 것이었어요. 그리고 그전엔, 그전엔…….” ‘이런. 기억이 안 나잖아.’ 리즈는 혹시나 주술의 효험이 떨어진 건가 싶어 다시 한번 속으로 되뇌었다. ‘파르델리오 히스클룸.’ “……아무튼 확실한 건, 각 가문의 교체 시기엔 상당한 혼란이 일어났다는 겁니다. 이방 민족의 침입도 잦고, 영토도 계속해서 줄었지요. 지금의 제국 영토가 초대 황제 시절의 삼분의 이밖에 되지 않는다는 건 다들 아실 테죠? 지금의 벨크메르 가문에서 또 다른 혈통으로 바뀐다면, 아마 그때는 절반으로 줄어들어 있을 겁니다.” ‘파르델리오 히스클룸.’ “현재 옆 나라 테렌디스 왕국이 제국으로 거듭날 것을 선언했다지요? 소왕국에 불과했던 나라는 불과 백 년 만에 그리되었어요. 그들이 세력을 키울 수 있었던 이유는 부유해서도 아니고, 전술이 탁월해서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내부의 균열이 적기 때문이죠. 무릇, 한 나라가 쇠락하는 건 외세의 힘 때문이 아니지요. 그러니까…….” 리즈는 안도했다. 대뜸 저지른 일을 무사히 수습할 수 있게 된 것에. “모든 건 여러분께 달렸어요. 여러분들이 힘을 합치면 루젠시아는 천 년 뒤에도 이 대륙의 절대 강자로 군림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고서적 열람실 한편을 차지하는 흥망성쇠의 표본으로 남을 겁니다.” “…….” 숨이 턱 막힐 듯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움직이지도 않았다. 표정이 하나같이 멍해져 있는 것이 머리에 충격이라도 받은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자 리즈는 별안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빙의된 여장부가 떠나고 자존감 낮은 리즈 베리움으로 되돌아온 기분이었다. 식탁 밑이라도 기어들고 싶은 심정이 간절했다. 얼어붙은 분위기를 깨기 위해 건배라도 청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데, 짝-, 짝-, 짝-. 박수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왼편에서 들렸다. 그녀의 왼편은 헤르시스의 자리였다. 황제가 박수를 치니 모두들 따라서 우르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연회장 궁륭을 한가득 울리는 박수 소리였다. 마지못해 치는 자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행동이었다. 손뼉이 터져 나갈 듯 치는 이도 있었다. 리즈는 사람들이 보인 반응을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지 좀처럼 알 수 없었다. 제가 박수받을 만한 짓을 하긴 한 건지. 아니, 사실 제가 무슨 말을 한 건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헛소리만 지껄인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확신 없이 여기 저기 배회하던 리즈의 시선이 돌연 한곳에서 멈췄다. 몬타네르 대공의 찻잔이……. ‘비어 있어!’ 자신이 되지도 않는 어설픈 연설을 하는 동안 마신 게 분명했다. 리즈는 대공의 안색을 살폈다. 안색이 굳어져 있었다. 하지만 독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흐뭇하게 웃으며 박수 치는 품이 그러했다. ‘뭐야. 나 그럼 괜한 짓 한 거잖아.’ 리즈는 허탈해하며 자리에 앉았다. 문득 테이블 아래로 제 손을 부드럽게 쥐는 커다란 손이 있었다. 리즈가 돌아보았다. 우렁찬 박수 중에도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는 또렷이 들렸다. “두 절기까지 갈 것도 없겠는데? 이걸로 입지는 확실히 다진 것 같으니까.” *** 쾅-. 마차 문이 너무 세게 열리는 바람에 집사가 문에 부딪혀 휘청거렸다. 하지만 다미엥 몬타네르는 한마디 사과의 말도 없이 긴 다리를 쭉 뻗어 바닥을 짚고 내려섰다. 포석을 밟는 걸음이 몹시 빠르고 거칠었다. 적자안 속에 비친 그믐달은 서슬 퍼런 대낫처럼 섬뜩했다. “전하.” 집사가 황급히 뒤를 따르며 하루 동안 대공저에서 일어난 일을 보고했지만, 대공은 듣지 않았다. 그는 기분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리즈 베리움.’ 그가 황후의 처녀 적 이름을 떠올리며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보통이 아닌 줄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그 자리에 입을 놀릴 줄이야.’ 게다가 연설 자체도 놀랍기 그지없었다. 구사하는 단어나 논리는 어설프기 짝이 없는데 묘하게 호응을 이끌어 내는 구석이 있었다. 원로들까지 동화시키는 걸 보면. ‘하긴, 그 고리타분한 꼰대들은 역사니 전통이니 혈통이니 그런 걸 좋아하지.’ 대공은 리즈의 말이 진행될수록 그녀를 보는 눈빛이 달라지던 원로들을 떠올렸다. ‘만약 의도하고 말한 거라면 그 계집은 정말 교활할 정도로 머리가 좋은 게지. 과연 헤르시스의 눈에 들 만해.’ 하지만 헤르시스의 눈에만 든 건 아니었다. 몬타네르 대공의 눈에도 들었다. 조금 다른 의미로. ‘약초 액인지 뭔지를 보내와서 봐 주려고 했는데 안 되겠군.’ 그는 자신의 머릿속 살생부에 리즈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헤르시스의 이름 옆에 나란히. 하지만 그에게도 신조가 있었다. 여인은 최대한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밟아 놓아야 한다. ‘고 계집을 어떻게 요리하면 좋을까?’ 골똘히 생각하며 걷고 있던 그가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그러자 뒤따라 걷던 집사가 하마터면 스타베팅너른 등에 코를 박을 뻔했다. “아론.” 대공이 허공에 대고 제 수행원을 불렀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길게 늘어지더니, 대공의 지척에서 멈춰 섰다. “내일 오전 중에 사람 한 명만 여기로 데려와.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예, 전하. 누구를 데려올까요?” 대공의 입매가 매끄럽게 휘어졌다. “클레르 베리움.”